칸트윤리학에 대한 비판

 쇼펜하우어의 윤리학 논문은 칸트 윤리학에 대한 비판과 쇼펜하우어 자신의 윤리학의 근거를 제시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이론철학, 특히 선험적 감성론을 탁월한 성찰이라고 극찬한 반면에, 칸트의 윤리학에 대해선 비판적이다. 쇼펜하우어는 칸트 윤리학의 명령적 형식에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가 들어있다고 비판한다. 칸트는 아무런 증명도 하지 않은 채로 우리의 행위가 복종해야 하는 법칙이 있다고 전제한다는 것이다. 윤리학에서의 명령적 형식은 모두 신학적 도덕에서 도입되었으므로, 법칙, 명령, 당위, 의무 등 칸트 윤리학의 기본개념들도 신학적 전제를 떠나서는 아무 의미도 지닐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절대적 당위, 무조건적 의무와 같은 개념들은 형용모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당위는 처벌이나 보상과 관련해서만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대적 당위를 의미하는 정언명령에란 있을 수 없고 이기적인 동기에 근거하는 가언명령만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조건적 당위에 따른 행위는 도덕적 가치를 지니지 않는 이기적인 행위이므로 가언명령이 윤리적 기초개념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명령적 형식에서의 신학적 전제를 지적한 후에 쇼펜하우어는 칸트 윤리학의 기초를 이루는 선천성, 의무, 법칙의 개념을 분석한다. 칸트의 이론철학에서의 선천성은 경험을 현상의 영역에 제한하는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선천적 종합판단은 현상에 대해서만 타당한 것이다. 그런데 도덕철학에서도 이같은 선천성이 근거로 제시된다면, 도덕법칙도 현상의 법칙에 지나지 않게 될 거라고 쇼펜하우어는 주장한다. 이 결론은 도덕의 영역을 물자체의 영역으로 간주하는 칸트의 주장과도 모순된다는 것이다.

 

 칸트의 무조건적 의무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그것이 자율적인 의무가 아니라 타율적인 의무라고 주장한다. 칸트는 의무가 법칙에 대한 존경심에서 나온다고 주장하지만, 의무는 법칙에 대한 복종심에서 일어나야 하는 행위일 뿐, 어떤 자율성도 지니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칸트의 법칙에는 보편성 자체라는 그것은 형식만 남는다. 법칙의 내용은 보편성 자체일 뿐이다. 이로부터 실제적 내용을 갖지 않는다는 칸트 윤리학의 또다른 문제점이 제시된다. 그렇다고 해서 피히테와 라인홀트가 주장하듯이 정언명령이 직접적 의식을 통해 나타나는 의식의 사실일 수도 없다. 의식의 사실은, 칸트가 도덕의 기초로 수용하지 않는 경험적 내용에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칸트의 도덕법칙은 어떤 내용도 경험으로부터 가져오지 않는 순수한 형식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쇼펜하우어는 기본개념들을 분석한 뒤에 칸트 윤리학의 최고 원리로 꼽히는 정언명령을 분석한다. 정언명령의 제1형식을 현실화하는 것은 이기주의라고 주장한다. 이기주의만이 의지를 결정하고 이기주의는 보편적 법칙으로서 정의와 인간애를 선택하게 하기 때문이다. 환언하면 보편적으로 따를 준칙을 결정할 때, 나 자신이 불리한 위치에 놓여있을 경우도 고려되어야 하므로, 언제나 정의와 인간애가 선택된다는 것이다. 누구나 정의와 인간애의 혜택을 받고싶어하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보편적 법칙에 대한 칸트 자신의 주장도 이기주의에 근거한다는 것을 밝힌다. 거짓말, 약속어기기, 불친절함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없는 것은 사람들이 나에게 똑같이 보복할 것이고, 내가 남의 친절을 바랄 수 없기 때문이라고 칸트는 설명한다. 따라서 칸트의 정언명령은 실제로는 이기주의에 근거하는 가언명령에 불과하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정언명령의 제2형식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목적 자체'라는 표현을 비판한다. '목적 자체로 존재한다'라는 말은 하찮은 표현이라는 것이다. 목적이란 의지(쇼펜하우어의 철학용어로서 의지를 말함)의 대상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의지와의 관련성에서만 이해되므로 '목적 자체'라는 것은 우스운 말이 된다. 정언명령의 제3형식인 의지의 자율성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관심없이 원하는 의지'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지 문제삼는다. 나아가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개념의 실재성을 검토한다. "무조건적이고 비교할 수 없는 가치"라는 존엄성에 대한 칸트의 정의를 쇼펜하우어는 그 고귀한 울림으로 인해 외경심을 일으키지만 실제로는 형용모순을 함축하는 한심한 과장에 불과하다는 설명이라고 비판한다. 가치는 상대적 개념일 뿐이어서, 비교될 수 없는, 무조건적 절대적 가치란 부당한 용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칸트의 윤리학은 신학적 도덕의 변장에 불과한 것으로, 옛날의 윤리학과 마찬가지로 어떤 확고한 근거를 갖지도 않는다고 쇼펜하우어는 결론짓는다.

 

윤리학의 근거

 

 칸트 윤리학의 핵심적 개념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해서 그 문제점을 보여준 후에,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윤리관을 말한다. 그동안 다루어졌던 윤리학의 거의 모든 문제들이 쇼펜하우어의 윤리이론 안에서 체계적으로 정리된다. 쇼펜하우어는 도덕의 기초를 이성과 법칙으로 보는 칸트와는 달리 동정심을 도덕의 기초로서 제시한다. 나아가 동정심의 근거를 형이상학적으로 설명하여 윤리학과 형이상학의 관계를 고찰한다.

 

 쇼펜하우어는 법적인 처벌이나 사람들 사이의 명예에 대한 고려가 없다면, 대다수 인간들은 각자의 천박한 성형, 즉 이기심이 이끄는대로 살아갈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종교적 가르침이 인간의 행동에 끼치는 영향도 미약하다는 것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의 이치와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걸맞는 행동을 하는 이들이 있으므로 윤리학의 과제는 그들의 행위의 요인이 무엇인지를 연구하는 것이라고 쇼펜하우어는 주장한다. 쇼펜하우어는 우선 도덕적 행동이란, 이기적인 동기를 갖지 않는 행위라고 정의한다. 그렇다면 이기적인 동기를 갖지 않는 행동이란 무엇을 의미하나? 여기서 쇼펜하우어는 행복주의의 관점을 내세운다. 쇼펜하우어는 행위의 궁긍적인 목적을 쾌락과 고통으로 설명한다. 행위자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제거하려는 행위는 이기적인 행위이고, 타인의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제거하려는 행위는 도덕적 가치를 갖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하찮은 쾌락의 무분별한 추구를 정당화하는 공리주의를 좋아하지만은 않는다. 쇼펜하우어는 행복에 대해 결핍의 지양과 고통의 사라짐이라는 에피쿠로스적인 정의를 받아들이긴 한다.

 

 쇼펜하우어는 윤리학의 최고 원리로서 "누구도 해치지 마라. 오히려 네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이를 도와라"를 제시한다. 이를 통해 그는 정의와 인간애라는 두가지 근본적인 미덕을 도출해낸다. 이기심에 따라 행동하는 인간에게 이 두 덕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은 동정심을 통해서다. 동정심이 인간이 지닌 참된 도덕적 동인이라는 것을 쇼펜하우어는 다양한 사례를 통해 이야기한다. 어떤 다른 근거에서 나온 고급한 행동보다 타인의 고통을 저지하려는 동정심에 근거하는 행동이야말로 도덕적 가치를 갖는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 반대의 경우인 포악한 행동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그 행위자가 겁없다거나 비이성적이라 말하지 않고 그에게 동정심이 부족하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동정심은 정의의 덕에서는 약한 정도로 나타난다.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저지하려는 심정에서 표현된다는 것이다. 정의, 불의를 동정심과의 연관성에서 고찰하므로 쇼펜하우어는 고통을 더 많이 일으킨 불의를 더 큰 불의로 본다. 다른 한편 쇼펜하우어는 정의의 원칙이 실정법과 독립적으로 언제 어디에서나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미개인도 불의와 정의를 구분하다는 것이다. 또한 쇼펜하우어는 정의의 덕에 관련된 세부개념으로 거짓말과 의무개념을 설명한다. "의무"에 대해 "의무의 불이행이 타인을 훼손하는 행위"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거짓말에 대한 칸트의 분석이 유치하고 황당하다며 비판하면서, 무력을 통한 정당방위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타인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거짓말이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쇼펜하우어의 정의관에서 타인을 훼손하지 않으려는 것이 정의의 덕이다. 이미 존재하는 타인의 고통을 제거하는 것은 쇼펜하우어에게 정의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애의 문제다. 여기서 동정심은 타인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에 이른다. 어떻게 이기적인 인간이 자기 희생에까지 이를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여기에서 생겨난다. 그것은 나와 타자(타인)의 동일화를 통해 가능하다고 쇼펜하우어는 생각한다. 고통받는 타자 속에서 나 자신을 인식하므로, 그의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타자에게서 나를 인식할 수 있는가? 이 주장을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윤리학을 완결하는 형이상학적 설명에서 물자체와 현상을 구분하는 칸트의 이론에 근거하여 설명한다. 현상적 존재는 시공간적 제약을 받는 존재로서 시공간적으로 분리된 수많은 개별자로 나타난다. 그러나 칸트가 주장하듯이 시공간적 존재는 나의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수많은 개별자의 배후에 있는 본질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것으로서 모든 개별자에게 동일하게 존재할 것이라고 쇼펜하우어는 주장한다. 이 인식이 바로 동정심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동정심을 갖는 이와 그렇지 않는 이의 차이는 자아와 비-아를 얼마나 뚜렷히 구분하는가의 차이다. 동정심을 일으키는 인식을 쇼펜하우어는 '이것은 너다'라고 표현한다. 타인에게서 자신을 인식하는 이는 모든 것에서 살아있다. 반면에 자신 안에서만 사는 이에게 자신의 육체의 죽음은 곧 세계의 소멸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윤리학이 동정심 발달에 기여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남아있다. 이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회의적으로 답변한다. 인간의 성격이란 선천성에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화, 도덕교육은 선천적인 성격을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도덕에 대한 망상에서 벗어나고, 올바른 생각과 이해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며 우리의 행위는 성격과 외부환경의 영향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으로 쇼펜하우어는 윤리학의 모든 문제를 나름대로 정리했고, 윤리학을 위한 자신의 근거가 완결된 전체성과 함께 경험적 실재성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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