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아퀴나스(1224/25년~1274년)는 기독교의 저명한 신학자이자 스콜라 철학자이다. 또한 자연신학의 으뜸가는 선구자이며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오랫동안 주요 철학적 전통으로 자리잡고 있는 토마스 학파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교회학자 33명 중 하나이며, 로마 가톨릭교회는 그를 천사장 신학자요 박사로 존경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그의 이름을 딴 학교나 연구소 등이 많이 있다.

 

생애

탄생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탈리아의 나폴리 근교 로카세카 성에서 아퀴노 지방 영주 중 하나인 란돌포의 9남매 중 일곱번째 아들(아들 넷 중에서는 막내)로 태어났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탄생 연월일을 명시한 기록은 전무하다. 이에 따라 그가 사망한 날짜를 기준으로 그가 태어난 해를 추정할 뿐이다.

 

사망

토마스 아퀴나스의 생애에 대한 최초의 기록자인 토코의 굴리엘모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49살이 되는 해에 사망했다고 전하고 있다.

 

한편 또다른 전기작가인 베르나르 귀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49살을 넘겨 50번째 해를 막 시작할 무렵에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루카의 톨로메오의 경우 '50살에 사망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가 48세에 사망했다고 말한다'라고 전하고 있다.

 

이런 서로 엇갈리는 기록들을 통해 볼 때 토마스 아퀴나스가 탄생한 해는 최소한 그가 48살까지는 살았다는 가정하에 1224년으로부터 1226년사이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 연구자들이 일반적으로 다소 사실성이 떨어진다고 평가하는 루카의 톨로메오의 기록보다는 로코와 베르나르의 기록에 더 무게를 둔 1224년과 1225년 사이에 태어났다는 설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하지만 이를 확정지을 만한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1226년 더 나아가 1227년 출생설도 전적으로 배제할 수 없다.

 

소년기

그의 아버지는 1230년경 막내아들 토마스를 성 베네딕토 수도회 소속의 몬테 카시노 수도원으로 보냈다. 여기서 토마스는 수도사 수업을 받는다. 전기작가들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몬테 카시노 대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까닭이 그가 미래의 수도원장으로 성장하길 바랐던 토마스의 부모들의 기원 때문이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1239년 경 토마스는 당시의 정치적 혼란 때문에 수도사가 되는 수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다.

 

그래서 몬테 카시노 수도원을 나온 후 당시 프레데리쿠스 2세의 후원으로 성장일로에 있던 나폴리 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나폴리 대학교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당시의 7개의 필수 학문인 문법, 논리학, 수사학, 대수학, 기하학, 음악, 천문학을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학자들은 이때 토마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도미니코회 수도사들을 접했다고 추정한다. 특히 도미니코회 수도사들과의 만남은 그의 삶을 결정적으로 바꾸는 계기로 작용한다. 미래의 몬테 카시노 수도원장으로 성장해줄 것이라는 가족들의 기대를 저버린 채 1244년 토마스 아퀴나스가 당시 프란체스코회와 더불어 새롭게 등장한 도미니코회의 수도사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에 당황한 토마스의 가족은 도미니코 수도원의 주선으로 파리로 유학가던 토마스를 도중에 납치하여 로카세카 성에 감금했다. 그리고 약 1년여간 회유와 협박을 동원하여 도미니코회에서 탈퇴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어떤 노력으로도 그의 소신을 굽힐 수 없음을 알게 된 가족들은 결국 1245년 여름 토마스 아퀴나스를 나폴리의 도미니코회 소속의 수도원으로 되돌려 보낸다.

 

이와 같이 귀족의 아들로서 몬테 카시노의 수도원장이 될 수도 있는 화려한 삶 대신에 소박한 삶을 사는 수도사가 되기를 선택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일화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누릴 수 있었던 모든 화려한 삶을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모방하기로 결심한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의 일화를 연상시킨다. 더 나아가 화려한 미래가 보장된 길 대신 청빈한 수도사의 길을 선택한 소년 토마스 아퀴나스의 일화를 통해 우리는 이후 재속 성직자들과의 논쟁에서 탁발 수도회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단호한 수도사와 대주교직을 정중히 사절하게 되는 겸손한 수도사의 모습을 동시에 엿볼 수 있다.

 

청년기

토마스 아퀴나스가 가족들의 연금에서 풀려나 나폴리로 돌아온 1245년부터 1248년까지의 행적, 특히 그가 1245년부터 1248년 전반기까지, 즉 그가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를 따라 독일의 쾰른으로 떠날 때까지 약 3년 남짓한 기간 동안 무엇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특히 그가 파리 대학교의 학생으로서 정규 교육 과정을 받았는지 여부에 대해 학자들은 논쟁을 거듭하고 있다.

 

그렇지만 최소한 그 3년간 파리 대학교 혹은 파리의 도미니코회에서 토마스가 7개의 필수 과목을 공부했었을 것으로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파리대학에서 강의하던 알베르투스의 신학 강의를 들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먼저 인문학부에서 수학한 이후에나 신학과에 진학하여 신학수업을 들을 수 있었던 중세 대학 체제 상 토마스에게는 알베르투스의 강의를 들을 자격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3년간의 파리 체제 이후 1248년 토마스는 쾰른에 있는 도미니코회 수도원에서 비로소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로부터 4년간 지도를 받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개연적이다. 이 시기에 토마스는 알베르투스의 영향 아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물론 디오니시우스의 신학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수행한다. 당시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다른 동료들이 붙여준 별명은 그의 우람한 몸집과 과묵한 성격을 바라보던 동료들의 장난기가 섞인 '시칠리아의 벙어리 황소'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별명과 관련하여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알베르투스가 "지금 벙어리 황소라 불리는 저 수도사의 우렁찬 목소리를 온세상이 듣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 별명과 이와 얽힌 일화와 전설들이 사실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이 전설들은 이국 땅에서 어눌한 외국어 구사능력으로 인해 혹은 몇몇 전설이 전하듯이 말더듬이였기 때문에 자신의 입장을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그래서 벙어리 황소라는 별명으로 동료들에게 놀림을 받았던 이 소심하고 섬세한 감성을 가진 청년 수도사 토마스의 숨겨진 일면을 드러내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더 나아가 소심한 젊은 제자의 침묵 뒤에 숨겨진 무한한 재능과 역량을 꿰뚫어보고 이것이 꽃피울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준 스승 알베르투스의 자상함과 혜안이 그가 전수한 학문적 지식과 더불어 미래의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어떤 영감으로 작용하게 되었는지를 미루어 짐작하는 데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명제집 강독자

1251년 말에서 1252년 초엽 알베르투스는 도미니코회 총장으로부터 파리에서 강의를 할만한 신학자를 추천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이에 알베르투스는 "학문과 삶에서 빛나는 성취를 이룬" 토마스 아퀴나스를 파리 대학교의 교수로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벙어리 황소의 역량을 누구보다도 일찍 꿰뚫어 본 알베르투스는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다. 특히 당대 최고의 학자 알베르투스의 강의, 심지어 그의 신학강의까지도 일부 분담할 만큼 신뢰를 얻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제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재능과 역량에 대해 의심할 사람은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도미니코회의 총장은 토마스가 당시 기독교 세계의 문화/학문의 중심지로 성장하고 있던 파리대학에 도미니코회의 대표자로서 추천받았다는 사실에 대해 무엇보다도 그의 어린 나이, 즉 스물 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난색을 표했다. 무엇보다도 총장은 파리대학의 교수로 학문은 물론 정치적으로도 수많은 문제들과 씨름을 벌일만한 노련한 학자를 원했다. 그의 복안은 종단의 정신을 대표하는 자리에 당대 도미니코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했던 인물이자 중세사회 최고의 지성인인 알베르투스를 파리대학으로 불러오는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알베르투스는 파리대학 교수로 "벙어리 황소"로 불릴 만큼 조용하고 소극적이며 이제 소년의 티를 갓 벗어난 토마스 아퀴나스를 추천했다. 총장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총장의 당혹감과 주저함에도 불구하고 알베르투스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파리로 가야 한다는 입장에서 단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총장의 망설임이 길어지자 알베르투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도미니코회의 선배 수도사이자 당시 추기경이었던 생 셰르의 위그까지 설득하여 총장에게 결정적인 압력을 가한다. 결국 위그의 지원까지 등에 업은 알베르투스의 요구는 관철되었다. 이렇게 토마스 아퀴나스는 페르투스 롬바르두스 명제집 강독자로서 파리 대학교에서 신학 강의를 하게 되며 1252년부터 시작하여 1256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이 강의와 더불어 신학교수로서의 자격을 얻기 위한 필수과정으로서 명제집 주석 집필에 착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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