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공자-3

라니포스 2018. 3. 23. 22:52

말년

아들과 아끼던 제자들을 잇따라 잃고 상심에 빠진 공자는 고향인 곡부로 돌아와 후학 양성으로 만년을 보냈다.

 

공자는 만년 들어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말하기를, "나이 열다섯에 학문의 길로 가기를 마음 먹었고, 서른에 이르러 세상에 나의 존재를 알렸으며, 마흔에는 어떤 일에도 미혹됨이 없었고, 쉰에 이르러서는 하늘의 뜻을 모두 알았으며, 예순에는 모든 일에 대해 순리를 알 수 있었고, 일흔에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고 하였다.

 

공자는 73세가 된 해인 기원전 479년에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승하하였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후 제자들은 스승이 남긴 말씀들을 모아서 <논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그리하여 공자의 가르침은 그의 사후에도 수 천 년 동안이나 이어지며 중국을 비롯하여 이른바 '중화'의 국제 질서에 속한 동아시아 대부분 국가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종범이 되었다. 또 공자는 세계 4대 성인 중 한 사람으로서 오늘날까지도 동, 서양을 막론한 세계 각국에서 인류의 영원한 스승으로 추앙되고 있다.

 

사후

공자의 승하 후 노성 북쪽(현재의 산동성 곡비현 북쪽)에서 장례가 치러졌다. 그의 제자들은 증자를 상주로 하고, 부모의 장례에 준하는 예로써 상복을 입고 그의 묘소 앞에서 3년상을 마친 뒤, 각자 고향에 돌아가 후학을 양성하였다.

 

이후 증자의 문인들과 그 제자이자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문인들, 자사학파에서 갈려 나온 맹자의 학파, 자궁의 학파, 자궁의 학파에서 분파된 순자의 학파가 크게 융성하였다. 이후 유학의 사상은 인간의 본성은 선하므로 교육을 통한 선한 본성을 보존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는 맹자의 성선설과, 인간의 본성은 악하므로 예로써 악한 본성을 억제하여야 한다는 순자의 성악설로 나뉘어 발전하게 된다.

 

738년 당 현종은 공자를 왕으로 추봉하여 '문선왕'의 시호를 내렸다. 1008년 송 진종은 시호 지성을 추시하여 '지성문선왕'이 되었다. 원나라에와서는 '대성지성문선왕'이 되었다.

 

명나라 건국 이후에는 '지성선사'라는 다른 별칭도 수여되었다. 1645년 '대성지성문선선사'의 칭호가 수여되었다.

 

한편 중국 대륙이 공산화된 후 중화인민공화국의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공자와 그의 사상은 중국 공산당에게 '악의 표상'으로 규정되었고, 이에 따라 공자묘와 비석 등이 파괴되었다. 유학서 및 다량의 공자 관련 유물 등도 무더기로 불에 타 사라지는 참화를 겪었다.

 

사상

공자의 중심 사상은 그가 제자들과 나눈 문답 형식의 언행집인 <논어>에 들어 있다. 이를 요약하면 인간이 취하여야 할 모든 행동의 궁극적 지향점은 인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체로는 지덕, 지선의 뜻을 지니고 있는 인도주의로서, 정치적으로는 명분을 바르게 하고,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부모는 부모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각자가 본분을 지킴으로써 국가와 가정의 질서를 유지시키며, 사회적으로는 자기의 도리를 다하고, 남을 부축하며, 자기가 싫은 것은 남에게 강악하지 않는 것을 비롯한 제덕으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이 하기 싫은 것,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을 강악이라 하여 악으로 간주했다.

 

인을 지향하고 예에 정진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군자요, 그렇지 못한 사람이 소인이자 악인으로서 군자가 덕을 생각할 때 소인은 이익만을 생각하며, 악인은 타인에게 해를 끼쳐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행한다. 또한 그는 '군자는 두루두루 소통하되 끼리끼리하지 않고, 소인은 끼리끼리하되 두루두루 소통하지 않는다.'라 설파하였다.

 

인간은 성인과 군자 외에도 인간적으로 범인과 소인, 악인으로 구분하여 생각하였다. 그러나 인은 성인만이 능히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자신도 외경할 만큼 이루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은 예에 엄격하여 절도가 있었으며, 성품은 엄숙, 온화, 원만하였다. 제자를 교육함에 있어서는 각인의 능력과 이해 정도에 따라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성품을 계발하도록 유도하였다. 사상이 현실적이고 현세적이었으며, 실용적, 합리적, 상식적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공자가 활동했던 시기의 은자들의 평가는 사뭇 달랐다. <장자>에서 도척이 공자에게 하는 말이나 '논어' 18:7에서 노인이 공자에 대해서 '팔다리로 부지런히 일도 하지 않고, 오곡도 분간하지 못하는데, 누가 선생님이란 말이오?'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생산활동을 도외시하고 결과보다는 뜻을 고려하는 태도에 회의적이였던 의견들이 당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생산활동을 하지 않는 사계급에 대한 비판은 법가에서도 드러난다.

 

정치관

공자가 교육에 있어 목표로 삼은 것은 국가와 사회를 이끌어 갈 지도층 인사로서 인격의 완성체인 이른바 군자의 양성이었다. 군자란 원래는 한 나라의 정치에 참여하는 능력과 자격을 겸비한 귀족 계층의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었으나, 공자는 그러한 지위에 어울리는 도덕적 인격, 정치적 능력, 인문적 교약을 지닌 사람으로 뜻을 확대하여 이러한 인재의 육성을 교육의 목표로 삼았다.

 

공자는 군자의 양성이라는 교육 목표를 위한 경전으로 춘추시대 이전의 여러 나라의 민요나 주나라의 조정에서 의식이나 제사를 지낼 때 부르던 가요 등을 편집한 <시경>과 주나라가 천명을 받아 왕조를 창시할 시기의 왕조의 기록 류를 정리한 <서경>등 종래의 전통을 익히고 이어가는 데 마땅한 서책들을 교범으로 사용하였다.

 

한편 공자는 노나라의 연대기적 역사서인 <춘추>를 편찬하는 동안 영고성쇠가 거듭되는 난세를 지켜 본 '역사의 산 증인'이기도 했다.

 

따라서 군자 양성을 목표로 한 공자식 교육의 내용이란 전통을 계승하는 데 적합한 교범의 숙달 및 난세로 치닫는 현실을 직시하고 통찰하는 눈이라는 두 가지를 중심으로 하였다.

 

철학

공자의 군자교육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인'이였다. 공자 사상의 핵심인 '인'은 하나의 문장으로서 명백히 개념이 규정되지는 않았으나, 대체로 박애, 도, 덕, 선 등의 뜻을 지니고 있는 심오한 휴머니즘으로서, 정치적으로는 이름을 바르게 하고, 이에 따라 임금은 임금 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책임과 본분을 다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 사회 생활에 있어서는 자기의 도리를 다하고 남을 부축하며, 내가 싫은 것은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을 비롯한 여러 가지 덕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인을 지향하고 예에 정진하는 사람이 군자요, 그렇지 못한 사람은 소인으로 규정했다. 군자가 덕을 생각할 때 소인은 이익만을 생각하며, 군자가 보편적임에 비하여 소인은 상대적이라고 역설, 인간을 인간적으로 구분하였다.

 

'인'은 공자가 생각하는 인간의 최고는 도, 덕 이었다. 덕이란 인간에게서 기대되는 개개인의 훌륭한 자질이라고 중국인은 생각하며, 동시에 그것은 영향력 내지는 인격력으로서 남에게 감화를 미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인의 정치사상에서 근간을 이루는 덕치주의 내지 정치에서의 도덕중심주의의 근거라고 하겠으며, 공자의 정치사상 근저에도 이 같은 기대가 있었다.

 

그는 당초 위정자 특히 최고 권력자인 군주에게 기대를 걸어 각국을 편력하면서 자기의 사상을 설명했다. 군주가 덕으로써 백성을 다스리고 이에 따라 백성의 덕도 높아져 그 결과로서 도덕이 고루 퍼진다면 온  세상이 저절로 평화로워진다는 것이 공자의 정치사상이었다. 그러나 이 사고방식은 난세 아래의 제후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에게 '인'을 터득하게 함으로써 학식과 함께 인격적인 '덕'을 겸비하는 군자가 되도록 하고, 그들을 장래 정치의 요직에 나아가게 함으로써 난세를 전쟁이 아니라 평화적 방법으로 평정하려 했던 것이다. 사상이 현실적이고 상식적인 듯하면서도 매우 심오하며, 제자들을 교육하는 데 있어서도 개인의 능력과 이해도에 따라 적합한 방법으로 유도하여 성품을 개발시켰다. 또한 그 자신은 예에 엄격하여 절도가 있었고, 엄숙, 온화, 원만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공자가 예에 대해서 말하기를 '사람이 어질지 못하면 예의가 무슨 소용이겠는가!'라 하였으며 또한 공자와 자하의 대화에서 채색은 흰 바탕이 있은 연후에야 가능하다는 비유를 들어 예의 근본에 대해 강조한 것에 따르면 공자의 '예'는 외면적 사회규범의 측면도 가지지만 그 바탕에 정직한 마음이 있어야 함을 알 수 있다.

 

백성을 중시하고 인간의 심미적 부분을 존중하는 것은 유교가 공자 사상의 장점이다. 반면 존비친소적 규범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유가의 삼년상이 대표적인 예이다. 공자는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을 다하기 위해 삼년상을 치르는 것이 사람의 도에 맞다고 여겼는데, 묵자의 사상을 지지하는 비판자들은 삼년상이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허례허식이며, 그와 같은 관념이 백성들의 이익을 저해한다고 주장하였다.

 

공자 사상과 묵자 이론은 존비친소적 규범에 관한 부분은 차이가 있으나, 본질적 이상의 차이라기보다는 방법론적 차이이다. 공자, 묵자의 사상을 서양 철학으로 분류하면 유심론에 가깝기 때문에 공유되는 부분도 존재한다.

 

공자의 사상은 생시에 실현되지 못한 채 증자. 자사를 걸쳐 맹자에 이르러 활기를 띠고, 한 무제 이후 중국의 사상계를 지배한 가장 커다란 조류를 이루었으며, 또 한국,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